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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 담론없는 담론- "우린 안 될거야 아마"

하지만 장기하와 88만원 세대를 엮진 말아줘
20대는 아름다운 루저일 뿐, 깜빡 잊혀진 세대일 뿐,
장기하로 대표될 수 없어. 그는 스타니까.

세대여, 제너레이션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미 기성세대일 뿐인 386에 붙어가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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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v.daum.net/link/3190276


20대 청년문화, 안 될 거야 아마

청년문화를 가늠해보고자 하는 시도가 부쩍 잦다. 얼마 전까지 세대문화를 한 두 문장으로 명쾌하게 정의내리는 건 불가능했다. 애초 같은 세대로서의 동질감이나 의식 따위가 존재하지 않았다. 공유되는 소비 코드도 없었다. 세대 담론은 전무했다. <88만원 세대>가 나오면서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말도 많아졌다. 문화가 아닌 경제 사회적 굴레로써 정의된 세대 개념은, 90년대 이후로는 더욱 드문 것이었다. 부정할 수 없는 현상의 나열과 짱돌을 들라는 수사적인 결론 앞에 청년들의 한숨기 어린 자조는 더욱 깊어졌다.

그런 좌절감 앞에 급기야 전에 없던, 일종의 문화적인 기류가 형성됐다. 소비를 통해 드러난 세대의 공기는 루저문화에 가까워 보였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에도 많은 매체들이 청년실업과 루저문화라는 두 가지 코드에 주목하고 있다. “젊은 세대가 루저문화에 심취해있다”는 식의 진단과 분석이 난무한다.

오늘의 청년문화는 정치와 무관하다. 혹은 무관하기 위해 애를 쓴다. 그래서 가져다 붙이기 쉽고 편리하다. 좌우를 막론하고 숱한 매체들이 청년실업과 루저문화를 다투어 입에 문다. 더불어 이쪽의 당위를 지키고 저쪽의 세계관을 비웃기 위한 논거로 활용한다. 이를테면 왼쪽의 청년실업은 신자유주의 가속화 때문이고 오른쪽의 청년실업은 좌파 정권 10년 탓이다. 누구의 해석이 옳든 청년실업 자체는 실재하는 현상이니 그러거나 말거나다. 그렇다면 대책이 중요한데 최근 서울시가 발표한 ‘청년 CEO 1000명 양병설’을 듣고 있자니, 똑똑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니 잘 하겠지 싶다만 그 청년과 이 청년이 같은 종류의 청년이라는 실감은 딱히 들지 않는다.

비관과 체념의 정서를 동반한다는 점에서 루저문화로 단정 지은 지금의 청년문화를 흡사 돼지독감 비슷한 질병의 일종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도 많다. 그래서 기사 말미에는 반드시 정신과 의사의 조언이 따라 붙는다. “그렇다고 자녀를 너무 닦달하는 건 좋지 않다.”

88만원 세대, 루저문화

어쨌든 오늘 날의 청년문화에 대해 정색하고 달려들어 해독해보려 하면, 그러니까 뭔가, 사실 별 할 말이 없다. 앞서도 말했듯이 지금의 청년문화는 정치적 구호 아래 애써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기사 제목 붙이기 좋으라고 어거지로 조합한 세대 구별용 문자 놀음도 아니다. 맥류와 동기를 논하기도 애매하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어 글쎄. 그래서 몇 가지 상징적인 문장들로 정리하기 쉬웠던 과거의 세대문화와도 확연히 구별 된다 그래도 애써 시도해보자면, 90년대가 “난 너와 달라” “모두가 예, 라고 대답할 때 아니오, 라고”였다면, 지금은 “난 제발 너이고 싶어” “모두가 예, 라고 대답할 때 빛의 속도로 그 누구보다 먼저 예, 라고 외칠 준비가 되어있어. 끼워만 달라” 랄까.

어쩌다 그리됐든 결과론적으로 보았을 때, 지금의 청년문화는 88만원 세대라는 현상과 루저문화라는 취향의 결합으로 어렴풋하게나마 그 꼴을 짐작해볼 수 있다. 결합은 자연스러웠다. 이 현상과 취향은 서로를 끌어당긴다. 자조는 비루한 자들의 언제나 가장 훌륭한 유희거리다.

그러나 어느 한쪽만 따로 떼어 지금의 청년문화를 규명하고자 하는 건 지루하고 의미 없는 작업이다. ‘루저문화의 기원’ 따위 기사를 쏟아내며 6, 70년대 펑크나 90년대 그런지를 헤집어 맥류를 끄집어내는 건 문자 낭비에 불과하다. 차라리 <고래사냥>이든 <바보들의 행진>을 떠올려도 루저문화의 자취는 쉽게 읽힌다. 그건 그리 부르기 전에도 그냥 그렇게 있던 거다.

문제는 지금의 청년문화와 종전 루저문화 사이의 체온이 사뭇 다르다는 데 있다. 루저문화라는 건 선택이 가능한 그야말로 취향의 문제, 혹은 정치적 신념의 문제였다. 지금 청년 세대 안에서 드러나는 루저문화의 흔적은 갈아입기 용이한 취향이나 구호라기보다 사회 구조적 환경으로부터 빚어진 어쩔 수 없는 굴레에 더 가깝다. 물론 이 사회 구조적 환경이라는 것에 대해 누구나 경각심을 가지고 주목하며 파악하고 있는 건 아니다. 지금 이 세대가 특히 그렇다. 어쩌다 그리됐다, 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어쩌다 세대

대충 부르기 쉽게 ‘어쩌다 세대’라고 부르겠다. 88만원 세대가 부조리한 환경으로부터 정의된 정치 사회적 분류라면, 어쩌다 세대는 그들의 문화소비 패턴으로부터 끄집어낼 수 있는 분류다.

공연한 조어를 하나 더 제시하는 건 지금 논의하고 있는, 단지 88만원 세대라는 구분만으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 문화적 특수성 때문이다. 게다가, 어쩌다 세대로 이름 지은 지금의 이 세대문화 그룹은 88만원 세대의 맥락 위에 있으면서도 그리 불리는 걸 썩 좋아하지 않는다. 이미 그 자체가 정치적인 구호처럼 들리기 때문이고 안 그래도 어디든 소속되고 싶어 죽겠는데 다시 한 번 타자화되는 게 고깝기 때문이다. 궁색한 자조는 역설적으로 즐겁다. 그러나 타자의 비웃음은 싫다. 연민은 더 참기 힘들다.

흥미로운 사실은 엄밀히 논증했을 때 88만원 세대의 개념적 범주에 들지 않는 청년 그룹 또한 어쩌다 세대의 패턴에는 포섭되고 있다는 점이다.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직장인이든 백수든 간에 관계없이 유사한 분류 안의 영화를 음악을 문학을 소비하고 "우리 세대는 말이야"라며 웃음과 한숨을 나눈다. 특정한 문화적 경험으로부터 세대를 관통하는 공감을 얻고 있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어쩌다 세대의 형성은 어찌해도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과정이었다. 그러나 이 세대의 문화소비 패턴은 이미 그 자체로 패션이 되었으며, 패션이라는 말의 어감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물리적인 개념으로써의 세대 전체를 아우를만한 경향이 되었다고 볼만하다.

해도 안 될 거 그냥 걷자

어느 세대문화든 아이콘이 있고 아이콘에선 그 세대문화의 지향점 혹은 욕망 따위가 발견된다. 장기하는 어쩌다 세대의 공공연한 아이콘이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성전환한 게이일 필요가 없듯, 명문대를 졸업한 자취 경력 미소유자 장기하 본인은 루저가 아니고 88만원 세대를 가로지를만한 명쾌한 담론과 선동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며, 그럴 이유 또한 없다. 그러나 장기하의 노래는 어쩌다 세대에 잘 어울려 호응한다. 비관과 자조의 한숨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흥겹게 주절거릴 수 있기에 정말 그렇다.

<느리게 걷자> <싸구려 커피> <아무 것도 없잖아> <별 일 없이 산다>를 비롯한 장기하의 노래가 공통적으로 드러내는 정서는 어차피 안 될 거 경쟁해서 뭐 하냐, 싶은 체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렇게 즐겁게 살고 있다는 선언적 자기 확신이다. <우리는 액션 배우다> <낮술> 같은 영화들 또한 비슷한 질감의 정서로 관객에 호응했다. 일반적인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비루한 현실임에는 분명하지만, 어찌됐든 그 안에서 즐겁게 살아간다는 느긋함이 드러난다.

바로 여기, 어쩌다 세대를 독해하는데 있어서 톤을 정확히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이건 칭얼대는 고생의 역사가 아니다. 고생기로 보는 건 또 다른 타자화고 폭력이다. 방점은 이렇게 눈물겹도록 치열하게 살고 있다, 가 아니라 좌충우돌 끝이 보이지 않더라도 띄엄띄엄 즐겁게 살고 있고, 혹은 그렇게 되길 희망한다는 지점에 찍힌다. 숱한 시선들이 그걸 치열한 고생으로 단정 짓고 혀를 차는데 그치기 때문에 청년세대는 다시 한 번 타자화되고 연민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이 나라에서 연민의 대상이 된 타자들의 종착지가 늘 그렇듯, 수사적인 온정의 시효가 끝나는 즉시 실질적이고 당연한 괄시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은밀한 연대

최근 인터넷 상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안 될 거야, 아마‘ 게임은 어쩌다 세대의 본질을 드러내는 가장 명징한 사례다(공교롭게도 어쩌다 세대의 선호에 포섭될만한 음악을 하는 '타바코 쥬스' 보컬 권기욱의 인터뷰로부터 유래되었다). 정말 잘 안될 거라 생각하든 말든 여부는 중요치 않다. 어쩌다 세대의 아무리 몸부림 쳐도 제 앞가림 할 구석이 막막한 상황을 한 줌의 웃음으로 자조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도피나 환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어쩌다 세대의 시점에서 바라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이 자조어린 웃음에는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싶은 일종의 안도감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이 안도감에는 의식에 앞서는 동물적인 연대의 욕망이 묻어난다. 물론 벗어나고 싶은 현실이지만 어차피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바에야 지금 이대로도 괜찮으니 다 같이 느리게 걷자는 이야기다. 그래도 괜찮다는 위로와 공감이다. 어쩌다 세대는 연대에 냉담하다. 정치적인 이유라기보다 촌스러워 보여서다. 연대와 당위를 입에 물어 피를 토했던 사람들의 현재 시제에 환멸을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그래서 더 절박하다. <느리게 걷는다>가 아니라 <느리게 걷자>로, 어쩌다 세대의 연대는 문화 소비를 통해 그렇게 은밀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답 없는 현실이라도 웃음으로 자위하고 안도하면서 서로를 확인하고 싶다는 것. 이것이 어쩌다 세대를 가늠할 수 있는 문화 소비의 중요한 패턴이다. 이런 경향은 승자독식구조로 일컬어지는 승자와 패자의 비례가 20 : 80, 10 : 90 으로 벌어질수록 가속화돼 문화 시장 전반에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 글_ 허지웅 (창비 세교연구소 포럼 발제문)

출처:20대 청년문화, 안 될 거야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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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일단 at 2009/05/18 16:14
하고 싶은 이야기, 즉 그래서 20대 청년문화의 특징이라는 게 뭔지 또렷하지가 않은 듯 하고..
(뭐라뭐라 말은 막 하는데 눈은 띠용@_@ 이런 느낌인가. 핵심이 안 느껴지는 듯도 하고.)

어쩌다 세대는 그러니깐 '어쩌다 보니 이렇게 (루저가) 되었다. 어쨌거나 느리게 가야지'라고
체념하고 자조하는 그런 세대라는 말인 것 같다고 애써 이해해 보았으나,
나도 20대고 내 주변도 몽땅 20대인 지금 나의 입장에서 '전혀' 공감이 안 되는데. 나만 그런가.

나야 세월아네월아 치열하게 살 거 뭐 있냐는 쪽이지만, 이건 10살 무렵부터 고수해왔던 내 삶의 방식이고,
이런 내가 '미련'하거나 '게으르다'고 손가락질 받는 게 몹시 익숙한데.
정말 그들이, 우리가 경쟁을 포기하고 자조하며 띄엄띄엄 즐기며 그렇게 살고 있나? 정말?

PS. 그렇지만 가장 모르겠는 건 역시, 장기하가 이 세대의 문화 아이콘이라는 사실(?).
정말이야? 나만 몰랐나.
뭐랄까, 허지웅씨는 30대구나, 라고 고개만 그저 끄덕였을 뿐.

어쨌거나 깊게 고민은 해보겠고, 고민할 수 있게 이야기해준 것에 매우 감사함.
Commented by 쉬운남자 at 2009/05/18 17:00
분석하신 '어쩌다'가 맞다면(저도 맞다고 생각합니다) 이시대 청년들은 '어쩌다'문화와 같은 어떤 주체문화를 가지고 있는게 아니라 가지고 있는 문화가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자의였던 타의였던 비인간적으로 성장한 이들은 종래의 인간적인 문화적 기반, 세대적 기반을 마련하지 못했죠. 물론 인간적이라는 기준은 종래의 기준입니다. 한 집단을 '비인간적'이라 싸잡아 매도하는 것은 제법 위함한 발언이기에 일본 같은데선 '신인류'가 등장했다는 식으로 그것을 무마하려고 하는게 아닌가 합니다.

비인간적 성장이든 신인류의 등장이든 이건 위기를 불러옵니다. 현생인류가 지구상에서 자취를 감출 위기말입니다. 이 적나라하고 비참한 위기는 실상 사람들 사이에서 존재하고 있지만 대부분이 덮어놓거나 체념하여 현재를 영위하는데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청년 문화는 이렇거나 말거나 우리는 웃고산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즉 회피와 덮어놓음을 조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같은 현실이 오래토록 덮여져있어서 실제로 잊혀지는 사고를 막기 위해 존재한다고 봅니다. 다만 적나라하게 이를 드러내는 일은 해결책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다 해결책을 찾지 않도록 훈련된 이들에게는 고통 이상일 수가 없기 때문에 개그적 코드를 집어넣어 해학을 부리는 것이지요. 실제로 안될거야 시리즈에서 사람들이 ㅋㅋ 거리는 이유는 웃기게 생긴 아저씨 얼굴 때문입니다. 패러디 역시 패러디 자체의 요소가 웃기거나, 상황 적용의 기발함에 대중적으로 소비될 수 있는 것이지 그것이 말하는 현실 자체에 대해 ㅋㅋ 거릴 수 있기 때문에 그런것은 아니라 봅니다. 오히려 정반대겠지요. 장기하의 경우는 그런 컬트적 요소와 함께 얼핏 보았을 때 그 의중이 무엇인지 알기 어려운 비상식적, 비이성적 코드를 사용했죠. 이게 뭔가 하면서도 모르는체 넘길 수 있고, 은연중에 현실을 공감하고 환기할수 있는 그런 거죠. 이 같은 '미끼'를 가지고 사람들을 '낚아'내지 않는 한은 사람들이 그 같은 현실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이 같은 문화 소비의 행태가 지속적이지 않고 일시적이라는데에도 그 같은 이유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을 환기시켜주는 시도는 좋지만 '해결책이 없거나, 해결책을 찾지 않도록 훈련된 대중'들에게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고통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현실을 알게끔 해주었다면 잠시 또 사라졌다가 잊혀질 때쯤에 새로이 등장해야죠. 이런 유행이 국소적, 우발적으로 등장했다가 또 썰물처럼 빠져나가게 되는 이유라 봅니다. 이 같은 행태는 사람들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위기감이 궁극적으로 해결 될 때까지 계속해서 반복될 거라 봅니다.

'난 제발 너이고 싶어' '모두가 예라고 할때 누구보다 먼저 예'와 같은 공감문화 역시 위기를 공감하고 현실을 환기하는 기능을 함과 동시에 잊혀진 과거의 인간성을 되찾으려는 시도라 생각해요.

어쨌거나 대중들은 문제 해결에 대해서 체념하고 있습니다.
단지 상처입지 않으려고 하고 위안만을 원하고 있어요. 때문에 제 글 같은 것은 반론의 여지조차 얻지 못한채 잊혀지게 됩니다.
문제에 대한 원인을 해결하면 더이상 두려워할 필요도 상처를 보듬을 필요도 없다는 걸 모르거나,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하죠. 원인이 불투명하게 가려져 있는데다가 대부분이 그렇게 되기를 강요 받아왔기 때문이고, 믿고 싶어하는 것을 믿는 사람의 본성도 한 몫하는거라 봐요.
다음은 저 혼자만의 생각이지만은, 그러한 위안과 회복에도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화적 역량이 더이상 사람의 마음을 보듬을 수 없어질 때에 새로운 위기로 찾아올 거라봅니다. 이것은 병든 사회에서는 문화가 옳게 자랄 수 없고, 어그러진 문화는 사회를 포용할 수 없다는 악순환에 의거합니다. 그 때에는 문화의 붕괴라는 새로운 위기와 그 때 드러날 종래의 위기가 가중되어 위기는 더욱 심각해질 것입니다. 문화를 대신할 어떤 새로운 존재가 등장한다 하더라도, 어차피 시간의 문제이지 악순환의 고리 속에 더 새롭고 더 심각한 위기만 초래할 뿐입니다.
결과를 어떻게 수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겠지만, 원인을 제거하면 애당초 결과가 존재하지 않게 되겠죠. 그런 식의 시도가 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대로는, 정말 우린 안될거라 봅니다.
Commented by 쉬운남자 at 2009/05/18 17:33
20대의 질병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흔해빠진 20대 징징거림으로 말하자면
사회 초년세대의 어떤 병든 것은 그 세대를 키운 사회가 병들어 있기 때문이지 않나요.

다른것과 틀린 것,
힘든것과 아픈 것,
이건 분명히 다른 개념입니다.

다르기 때문에 틀린 것은 노력으로 해결될 수 있지만 틀리기 때문에 다른 것은 바른 것을 앎으로 인해 바로잡아질 수 있습니다. 뭔가를 아는 것은 단순히 '노력해라'로 인해 초래될 수는 없죠.
힘들어서 아픈 건 힘든 일을 쉬거나 조절함으로 안 아플수 있지만 아파서 힘든 것은 치료하지 않는 한은 해소되지 않는 고통이예요. 마찬가지로 아픈 것의 치료는 단순히 시간을 두어 쉬는 것으로는 막연합니다.

종래의 세대는 부족했지만 건강했던 시절이었다면, 지금의 시대는 풍족하지만 병든 시대입니다.

오래된 논란거리이긴 하지만 20대와 선세대는 이렇듯 다르며, 선세대의 기준이 쉽게 20대에게 적용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Commented by dutnee at 2009/05/18 17:41
잘 읽었습니다. '지금의 청년문화' 보다 '어쩌다 세대' 가 훨씬 걸맞는 표현이라고 봅니다.
'청년문화'는 뭐랄까 조다쉬 냄새가 너무 난달까요;
Commented by ㅋㅋㅋ at 2009/05/18 18:19
구직 활동을 하고 있는 대학4학년생입니다. (여자)
요즘들어서
막연하게
우리 '세대'는 이청준씨의 병신과 머저리 소설에 그려진 동생들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 같단 생각을 합니다.
실제하는 아픔같은 건 없는데 어쩌다보니 다들 아프려고 기를 쓰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그게 아니라면 정말 큰 아픔같은 걸 겪어보지 않아서 작은 아픔에도 기가 팍 질려 나자빠지는 뭐 그런 겁쟁이 상태라고 해야할까요. 저만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냥 제 주변 친구들도 보고 있으면 맘이 답답하고 안타깝네요.
그냥 다들 힘내고 즐겁게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역시나 즐기며 열심히 산다고 해서 그 노력의 반이라도 확실하게 보상해줄 수 있는 한국 사회도 아니겠지만요.
휴............... 우울해지네요.


by art digger | 2009/05/19 11:46 | digger's culture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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